종전전후(終戰前後)-오청원 氏와의 3번기
입단한 후로는 순조롭게 승단하여 1941년 봄에 五단이 되었다. 그런데 그 해가 저물어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날로 치열해져서 應召(응소:소집령?)나 징용되는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나도 어떤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돌을 만지지 않으면 어쩐지 서운했으므로 밤이 되면 사원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43년 부터는 신문도 바둑 연재를 중지하는 사태에 이르렀으나 일본기원의 승단시합만은 가까스로 계속되었다. 나도 그것만이 오직 하나의 즐거움이었으므로 반드시 참가하여 1944년 1월에는 六단이 되었다. 45년 5월의 대공습으로 다메이께에 있는 기원도 전소되어 바둑계도 얼마동안 공백기로 들어갔다.
전후 최초의 승단시합은 간다의 어느 셋방에서 열렸는데, 이 해 가을 나는 七단이 되었다. 47년 봄, 마에다 七단(당시)을 비롯한 7명의 기사들과 함께 기원을 탈퇴하여 <위기신사:圍碁新社>를 만들었다. 그 동기는 그다지 깊은 것이 아니라 전후의 황폐상이 심했으므로 기사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지 해야 되겠다는 젊은이들의 기분이 <위기계의 개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원하는 신문사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곧 길이 막혀버렸다. 거기에다 한정된 기사들만을 상대로 해서 대국하자니 자극이 적었다.결국은 기원 간판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아 49년 봄에 모두 일본기원으로 복귀했다.
<위기신사>에서 내가 겪은 가장 큰 사건은 孤高의 기사 오청원 氏와의 3번기이다. 제1국은 종반까지 우세했던 것을 사소한 착각으로 인하여 한 집 지고 말았으며 이에 속이 상하여 나머지 2국도 연달아 지고 말았다.
승부를 마치고 깨달았지만, 나는 바둑 자체보다도 오氏의 관록에 압도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온갖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새삼 깊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