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경중묘(碁經衆妙)
1911년 임원미(林元美)가 저술한 사활문제집.
기경중묘는 4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사는 수, 잡는 수, 치중수, 제2권은 패와 수상전, 제3권은 건너는 수, 연단수, 협공하는 수, 연결하는 수, 끊는 수, 제4권은 해답편으로 되어 있다.
사활문제집으로 현현기경, 발양론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이다. 앞의 두책과 다른 점은 간명하고 실전적인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활문제 출제에 기경중묘의 맥이 인용되는 점으로 보아도 그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임원미는 15대 문인으로서 박학다식하여 바둑책 이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기경정묘(碁經精妙)는 중묘(衆妙)의 후편. 특히 난가당기화(爛柯堂棋話)는 너무도 유명할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바둑 이야기책이다.
■ 임원미(林元美)
다른 세 집(3家元)과는 달리 역대 임가(林家)에는 비교적 인재가 적었다. 그 중 강했다는 사람이 11세 임문입(林門入), 원미이다.
1778년생으로 9세 때 인근의 절 주지에게 바둑을 배웠는데 잠깐 사이에 선생을 능가했다. 10세 때 본인방 열원(烈元)의 문하에 입문. 열원은 원미를 <바둑계의 봉추(鳳雛)>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 1년 후 입단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25세에 5단이 된 원미는 서울 유람을 하다가 머물러 있던 한학자의 집 딸과 뜻이 맞아 결혼하여 함께 돌아왔다. 이 사실이 스승 열원을 진노케 했다. 본인방은 승직(僧職)이므로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열원으로서는 미구에 본인방을 계승할 사람(원미)에게 제멋대로 행동하게 해서는 난처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원미보다 9세 아래인 장화(丈和)의 재능을 내다보고 상속자의 자리를 바꾸기 위하여 유람을 시켰다고도 한다.
1802년 임가를 계승, 그 해부터 어성기(御城碁)에 출사했다. 같은 해 10원 정상인석(井上幻庵因碩)과 함께 상수(上手;七段)에 추대됐다.
원미는 바둑보다도 박식하기로 더욱 알려져, 당대 기사 중 손꼽는 재인(才人)으로 유명했다.
그는 1861년 84세까지 장수했다.
1830년을 전후하여 수년간 봉인방 장화와 정상환암인석은 명인기소(名人棋所)를 걸고 추잡한 이면 공작이 치열했다. 이 다툼에 다른 종가들도 휩쓸려 임원미는 장화에게, 안정선지(安井仙知)는 환암인석에게 협조하였다. 임원미가 장화를 지지한 그 이면에는, 장화 명인 취임과 동시에 임원미를 8단에 추거한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1831년 갑자기 장화의 명인기소 취임이 발표된다. 여기에는 임원미의 조력이 크게 작용했다. 즉, 임원미는 팔방으로 이면 공작을 펴서 장화를 명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여러 차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장화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임원미와 장화의 맹우 관계는 이리하여 무너지고, 반대로 임원미는 장화를 끌어내리는 책동을 하기에 이른다.
1838년 임원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장화가 안정가(安井家)의 상속자 준철(俊哲:후일의 算知)에 대한 7단 승격을 인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 승단은 상부의 재가를 얻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어서, 임원미는 전에 밀약이 있었던 여러 사정을 상부에 벍히고 장화와의 쟁기(爭棋)를 소청하였다.
결국, 임원미의 쟁기 소청은 허가되지 않았으나 그 면목을 세워 주어 장화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임원미의 8단 승격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1854년 은퇴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양동환의 '묘수와 속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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